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 상륙작전 (문단 편집) === 배경 ===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된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공세종말점|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이 소련에게 공여받은 250여대의 [[T-34-76|T-34]]전차의 경우, 서울에서 탱크 쇼크에 맛을 들인 북한군 수뇌부에 의해 제대로 된 제병 합동 전술을 만들지 않고 무의미하게 기갑전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별다른 전술 없이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회용으로 소모해버린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유엔군사령부|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 [[월튼 워커|워커 중장]]의 [[우주방어]](방어전략)로 간신히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을 저지선으로 선택할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게되어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